글이란 체험과 사색의 기록이다
드라마속 역사를 들여다 본다. _ 조선왕을 말하다 본문
조선왕을 말하다 _ 치세에 성공한 왕과 실패한 왕의 차이 ?
① 태 종 - 태평성대를 위하여, 수고는 모두 내가 맡겠다
모든 군왕은 성군으로 기억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성군은 노력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군주의 피나는 노력이 시대의 요구와 합치될 때 탄생할 수 있다. 때로는 성군의 등장을 위해 역사는 악역을 요구하기도 한다. 태종은 역사가 자신에게 부여한 악역의 길을 피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간 군주였다.
② 세 조 - 리더가 시대를 잘못 읽으면 나라가 혼란해진다
역사는 때로 양자택일을 요구한다. 쿠데타로 집권한 공통점을 갖고 있는 태종과 세조는 모두 공신 제거를 통한 왕권 강화나 공신과의 권력 분점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미래를 위해 공신 제거를 선택한 태종의 결과물이 세종인 반면 오늘을 위해 공존을 택한 세조의 결과물은 후사 예종의 의문사였다.
③ 연산군 - 뜻이 옳아도, 고립된 권력은 실패한다
정치는 기본적으로 세력관계이다. 연산군은 왕권을 능가하는 공신세력을 제거해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그는 공신들의 빈자리에 좋든 싫든 공신세력의 정적인 사림을 배치해 우군으로 삼아야 했으나 갑자사화 와중에 사림까지 제거하는 우를 범했다. 공신들은 군사를 일으켜 그를 쫓아냈고 사림은 붓으로 쿠데타를 합리화했다.
선조(宣祖 / 1552~1608 / 재위 1567~1608)
1. 방계 출신의 왕족
-. 조선왕조에서 왕실의 방계에서 처음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선조였다. 선조는 中宗의 서자였던 德興君의 셋째 아들 / 덕흥군은 중종의 일곱째 아들로, 昌嬪安氏의 소생이었다.
-. 조선시대 대원군은 덕흥대원군을 시작으로 인조 아버지 정원대원군, 철종 아버지 전계대원군, 고종 아버지 흥선대원군 등 모두 4명에 이른다.
2. 명종은 과연 선조를 후계자로 생각했을까
-. 선조가 왕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명종이 34세에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 문정왕후와 윤원형 일파의 득세로 왕 노릇 한번 제대로 못했던 명종은 순회세자가 13세의 어린 나이로 죽는 바람에 후계자가 없었다.
-. 仁順王后 심씨는 명종이 위독했을 적에 덕흥군의 셋째 아들 하성군을 후계자로 정했다고 말했다.
3. 동서분당, 당쟁의 씨앗이 싹트다
-. 趙光祖를 비롯한 신진사류들이 己卯士禍 이후 물러나 있었던 인물들이 정계에 복직하기 시작했다. 명종이 불러도 움직이지 않던 李滉이 예조판서로 임명되었고 조광조의 제자인 백인걸(白仁傑)이 직제학이 되었다. 반면 명종과 문정왕후의 비호 아래 정권을 농락하던 윤원형 등 권신들은 몰락의 길을 걸었다.
-. 선조의 등극으로 신진사류인 사림세력이 정권을 잡았지만, 선조 초반에는 명종의 고명을 받은 이준경과 인순왕후의 아우로 외척을 대표하는 심의겸이 핵심 세력이었다. 결국 이들 간의 알력은 향후 정치적 파란을 몰고 올 수 밖에 없었다.
-. 1572년(선조 5년) 이조정랑 오건이 자신의 후임으로 신진사림을 대표하는 김효원을 추천했다. 김효원은 이황과 조식의 문인으로 문과에 장원 급제한 수재였다. 그 당시 심의겸은 이조참의로 있었는데 김효원이 이조정랑 자리에 오르는 것을 반대했다.
심의겸이 김효원을 반대한 이유는 과거에 김효원이 윤원형의 집을 들락거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심의겸은 김효원이 권신에게 아첨이나 하는 소인배라 여기며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김효원이 낙마하자 그를 추천한 오건이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면서 파문은 커지기 시작했다.
#. 이조정랑은 정5품의 관직으로 품계는 낮은 자리이지만 인사권이 이조판서에게 있지 않고 이조정랑에게 있었던 것이다. 당상관도 이조정랑을 만나면 말에서 내려 인사를 했을 정도로 이조정랑의 자리는 막강했다. 이조정랑은 자신의 후임자를 지명할 수 있는 특권이 있었고, 정랑직을 어디에서 차지하느냐에 따라 권력이 움직였다.
-. 이조정랑에 오른 김효원은 심의겸을 가리켜 “미련하고 거칠어서 중용할 때가 없다”며 모욕적인 언사를 서슴지 않았다. 김효원의 후임으로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이 거론되자 김효원이 이중호의 아들 이발을 자신의 후임으로 추천했다. 심의겸과 김효원의 대립은 결국 선배사림과 후배사림의 분열이라 일컬어지는 ‘동서분당’으로 이어졌다.
-. 김효원은 서울의 동쪽에 살았기 때문에 동인이라 불렀고, 심의겸은 정릉동에 살았기 때문에 서인이라 했다. 동인들은 유성룡·김성일·이발·이산해·이덕형 등 이황과 조식의 문인들이 많았고 서인은 정철·송익필·윤두수·신응시 등 이이와 성혼의 제자들이 많았다. 동서분당 이후 율곡 이이가 동인과 서인의 조정에 앞장서기도 했으나 실패하고 이이가 죽은 뒤로는 ‘동인천하’의 세상이 되었다.
4. 정여립과 기축옥사
-. 동서분당 이후 최대의 옥사가 정여립 반역사건을 기화로 일어 났으니 己丑獄死이다.
정여립은 1570년(선조 3년)에 25세에 문과에 급제 / 정여립이 문제의 인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서인에서 동인으로 전향하면서부터이다. 동인으로 전향한 뒤로는 이이를 소인배라며 비난했다. 정여립의 거친 언사로 선조의 눈 밖에 난 정여립은 계속되는 천거에도 불구하고 등용되지 않았다.
-. 낙향한 정여립은 진안군 죽도(竹島)에서 書舍를 차려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불만 있는 사람들을 모아 무술 훈련을 시켰다. 1589년(선조 22년) 황해도 관찰사 한준과 안악군수 이축, 재령군수 박충간 등이 연명하여 정여립 일당이 한강이 어는 겨울을 틈타 서울을 침범하려 한다며 고발하였다.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혀가자 정여립은 아들 옥남과 함께 죽도로 달아났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스스로 칼자루를 땅에 꽂아 놓고 자결했다.
-. 서인 세력은 정여립 사건을 계기로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했다. 서인의 실세 정철이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이 사건의 조사관이 되면서 사건의 진위와 상관없이 동인의 유력인사들이 처벌되었다.
정여립 사건으로 연루되어 처단 당한 세력들은 선조의 실정에 대해 비판적인 사람들이었다. 괘씸죄가 역모죄로까지 비화된 것이다.
5. 200년 평화가 국방체계를 무너뜨리다
-. 1592년은 조선이 건국된 지 200년이 되는 해였다. / 16세기 후반 오다 노부나가를 이어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출병’을 표명하고 1592년 4월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선조는 류성룡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고 신립(申砬)을 도순변사(都巡邊使)로 삼았다. 신립의 패보를 접한 선조는 피난을 결심했다.
6. 도성과 백성을 버린 왕으로 평가
-. 선조가 도성을 버리는 순간, 백성은 경복궁과 창경궁 등 궁궐을 방화하고 노비문서를 소각했다. 선조의 통치권은 사실상 마비되었다. 한양과 개성에 이어 평양이 함락되자 선조는 요동으로 망명할 채비를 갖추었다. 의주로 향하기 전 선조는 광해군에게 종묘와 사직을 받들도록 했고 이후 광해군의 분조는 이로부터 16개월간 지속되었다.
-. 선조가 요동으로 망명할 생각을 할 무렵 의병이 봉기하고 이순신이 해상권을 장악하여 전세는 역전되고 있었다. 여기에 이여송이 이끄는 명의 지원군이 참전하면서 평양성을 수복하였다. 전쟁은 2~3년간 소강상태로 접어 들었다. 그러나 화의가 결렬되면서 1597년 도요토미는 또다시 전쟁을 일으켰다. 원균이 거제전투에서 참패하면서 이순신이 재등용되어 명량대첩에서 왜군에 큰 타격을 입히고 이후 도요토미가 사망하면서 1598년 노량해전을 끝으로 일본군은 완전히 패전하였다. 새로운 왕조를 세울 힘마저도 잃어버린 조선은 원천적인 쇄신 없이 이어져 갔고, 지배세력들은 기득권을 여전히 유지하였다.
-. 후궁 출신의 서자로 왕위에 오른 선조. 명민하면서도 학문에도 조예가 있었던 선조는 1608년에 치세를 마감하였다.
선조의 치세기는 임진왜란이 있었던 시기였고 정치적으로는 신진세력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선조는 일본의 침략을 내다보지도 못했고, 전란 뒤에도 제대로 난국을 수습하지 못한 왕으로 기억되고 있다.
④ 광해군 - 서른세 살의 준비된 임금, 세 살 적자와 후계를 겨루다
광해군의 즉위길은 험난했다. 안으로는 적자 계승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선조와 권력의 독점을 원하는 소북이 흔들었고, 밖으로는 원군 파견을 계기로 그간의 형식적 조공관계를 실질적 지배관계로 전환하려는 명나라가 흔들었다. 광해군은 피를 토하며 이런 상황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넓혔다. 그것은 새로운 군주상의 탄생 과정이었다.
광해군 (光海君 / 1575~1641 / 재위 1608∼1623)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이었다. 선조는 正妃 의인왕후(懿仁王后) 박씨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었다. 대신 후궁들과의 사이에 1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공빈(恭嬪) 김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왕자가 임해군(臨海君)과 광해군이다.
선조는 54세 때인 1606년, 새로 맞이한 정비 인목왕후(仁穆王后)에게서 다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얻었다. 하지만 광해군이 즉위한 뒤 임해군과 영창대군이 역모 혐의를 받아 죽었다.
광해군은 인빈(仁嬪) 김씨의 손자인 능양군(綾陽君_정원군의 아들, 인조)에 의해 왕위에서 쫓겨났다.
1. 임진왜란 극복의 원동력, 광해군의 분조 활동
-. 1592년(선조 25), ‘7년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임진왜란을 극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광해군의 분조(分朝) 활동이 아닌가 한다. 의주와 평양 등지에 상주하였던 宣祖가 있던 조정과는 달리 전쟁 극복을 위해 광해군이 주도하던 조정을 말한다.
-. 적자가 없어서 세자 책봉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된 조선은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그에게 분조의 책임을 맡겼다. 광해군은 전쟁 기간 중 평안도나 강원도 등을 돌며 민심을 수습하는 것은 물론이고 경상도나 전라도 등지로 내려가 군량을 모으고 군기를 조달하는 등 상당한 공로를 세웠다. 그의 분조 활동은 임진왜란을 극복하는데 주요한 요인이 아닐 수 없다.
2. 영창대군의 탄생과 위협받는 세자 지위
-. 1602년 선조는 이조정랑 김제남의 딸을 왕비로 맞아 55세가 되는 해인 1606년(선조 39) 인목대비와의 사이에서 영창대군이 출생하였다.
-. 1602년 신료들은 명나라에 왕세자 책봉을 하자고 건의하나 선조는 그것을 거절한다. ‘중전의 책봉을 먼저 주청하여 國母 자리를 바르게 한 다음에 왕세자 책봉을 주청해야 인륜이 바로 선다.’는 것이 이유였다.
선조의 이러한 태도는 광해군에 대한 견제였다. 임진왜란 시 권위에 흠집이 생긴데다, 명군에 의해 ‘무능한 임금’이자 ‘퇴위시켜야 할 대상’으로 매도되었던 울분이 광해군에게 향한 것인지도 몰랐다. 권력이란 父子 사이에도 공유될 수 없는 것이었다.
3. 어렵사리 왕위에 올랐으나
-. 광해는 왕위에 오른 직후 선조 말년에 자신을 반대하고 영창대군을 지지했던 세력의 핵심인 유영경과 그 일당들을 제거하였다.
-. 선조의 승하와 자신의 왕위 계승을 알리고자 중국에 사신으로 파견하였으나 명나라에서 선조에게 장자가 되는 임해군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차자인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것에 이의를 제기하자 결국 임해군에게 미친 행세를 하도록 해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순탄치 않은 왕좌였다.
-. 자신과는 배다른 형제로 적자인 영창대군의 존재는 항상 광해군의 왕권에 부담이었다.
-. 1613년 서자로서 관직 진출이 막힌 것에 대해서 울분을 품고 생활하던 박응서 등이 모사를 꾸미기 위한 자금 확보를 위해 조령에서 銀商을 살해하고 은을 약탈한 “칠서지옥(七庶之獄)” 사건이 발생하였다.
체포된 박응서 등의 취조 도중 포도대장 한희길이 사주한 영창대군의 어머니인 인목대비의 친정아버지 연흥부원군 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추대하고 역모를 한다고 발언이 나왔다.
결국 이 일로 김제남은 처형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 교동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어린 나이에 생을 마감해야만 하였다. 얼마 후에는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 역시 폐비가 된 뒤 서궁에 유폐되기에 이르렀다.
4. 용의 꼬리 / 뱀의 머리 / 실리외교를 선택하다
-. 광해군은 장애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해 가면서 왕권을 강화하였다. 광해군의 지지기반은 임지왜란 때 의병활동을 통해 실질적인 조력자가 되었던 인물들이었다. 정인홍을 비롯한 일부 북인들은 정계로 나와 광해군의 지원군으로 나왔다. 이들이 바로 대북파였다.
하지만 대북세력은 너무나 적은 세력이었다. 광해군에게는 대북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 임진왜란 중에 불탄 궁궐을 중수하거나, 민생 및 재정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선혜청을 설치하여 백성들이 특산물을 받치는 대신 쌀을 내게 하였던 대동법을 시행하는 등 전란으로 황폐해진 국가를 재건하는 데 주력하였다. 또한 허준을 지원해 동의보감 편찬을 마무리했다. 아울러 그는 당시 조선을 둘러싼 대외관계 속에서 실리외교를 지향하는 전향적 자세를 보였다.
-. 명나라는 임진왜란 때 파병으로 재정이나 군사력부분에서 많은 손실을 보았다. 서서히 명나라는 기울어져 갔으며, 반면 여진족은 점차 강성해지고 있었다. 광해군은 국가의 국방 경비를 정비하는 한편 무기 제조 등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였다. 광해군의 입장에서는 멸망하는 용의 꼬리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성장하는 뱀의 머리를 잡을 것인가? 고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광해군은 철저하게 실리를 선택하였다.
-. 1618년 명나라에서 조선에 군사의 파병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시세를 관망하였다.
그리고는 끝내 파병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자 강홍립에게 비밀 교지를 내려 후금과 대적하지 말고 시세를 보아 판단하라고 하였다.
전장에 도착한 뒤 치러진 심하 전투에서 대패하자 강홍립은 광해군의 밀지대로 오랑캐 진영과 협상을 하고 무조건 항복하였다.
후금에 투항한 강홍립 일행은 이후 광해군과 개인적인 서신교환을 통해 후금의 동정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 후금의 누르하치는 조선의 부득이한 사정을 이해한다고 하면서 지속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자고 제안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신들의 입장은 달랐다. 패전 이후에도 명은 계속 군대를 요구했고, 광해군은 이를 응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사대부들에게 광해군의 이런 태도는 명에 대한 예의를 저버리는 배신행위와 같았다.
이로인해 광해군을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맞게 된다.
광해15년 반란군은 순식간에 창덕궁을 포위했다. 인조반정(1623년 광해15년)이었다. 반군세력은 광해군을 폐위 시키고 능양군을 왕위에 올렸다. 훗날에 인조였다. 반정세력들이 내세운 명분은 재조지은 (명이 조선을 구원하여 도와준 은혜). 광해군이 후금과 내통하고 명을 멀리함으로 물러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명의 은혜를 다해야 한다는 명분은 지켜지지 않았고 인조는 병자호란을 겪은 후 청과 군신관계를 맺게 이른다. 청나라 태종이 인조의 항복을 받고 세운 삼전도비 인조반정이 남긴 것은 조선을 기울게 한 치욕의 역사였다.
5. 묘호조차 갖지 못한 왕
-. 광해군은 인조반정으로 축출됨으로써 통상의 다른 왕들이 갖는 묘호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 광해군이 반정으로 축출된 이유는 패륜적 행위와 외교정책 때문이었다.
당시 지배층인 사림들은 명분을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인륜을 중시한 것은 물론이고, 대중국관계에서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왔던 명나라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취한 모습은 이것과 사뭇 달랐다.
⑤ 선 조 - 불투명한 후계자 계승,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리다
절차의 투명성은 결과 못지않게 중요하다. 특히 대통처럼 최고 권력을 잇는 절차는 나라 안의 모든
사람들이 납득할 수 있는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 절차가 불투명하면 정국이 혼란해진다. 당사자는 정통성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이는 정국 운용에 큰 부담이 된다. 호문과 호학의 군주 선조의 큰 문제점이 바로 불투명한 왕위 계승 과정이었다.
⑥ 인 조 - 어진 임금 인조, 어린 손자들까지 죽음으로 내몰다
명분과 현실의 괴리는 비극을 초래한다. 병자호란 이후 청나라를 섬겨야 했던 인조는 청나라를 인정
하려던 소현세자를 제거했다. 청나라에 맞서 싸우지는 못하면서 청나라를 인정하면 난적이 되는 모순은 이후 조선 지배층의 정신세계에 숱한 악영향을 끼쳤다.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모순은 분노의 표적을 찾았고 세자의 남은 가족이 그 대상이 되었다.
인조 (仁祖 / 1595~1649 / 재위 1623~1649)_왕이 되고자 정변을 준비하고 앞장서다.
1. 광해군에게 눌린 울분의 세월
-. 인조는 선조의 다섯째 아들인 정원군과 구사맹의 딸(인헌왕후) 사이에서 1595년 왜구의 침입으로 피신 중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선조는 14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영창대군 외에는 모두 후궁의 소생이었다. 광해군이 왕위에 오른 후 인조의 친부인 정원군은 광해군의 견제를 상당히 받았다.
인빈 김씨 소생인 정원군은 4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인조(능양군) 외에도 능원대군, 능창대군, 능풍군이 있었다. 아들인 능창군이 모함을 받아 17세의 나이로 죽임을 당하자, 몸과 맘이 상하여 40세에 세상을 떠났다. 이들의 죽음은 후일 인조가 반정을 일으키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 장남이었던 능양군 대신 동생인 능창군이 역모로 죽게 된 것에는 성품이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 짐작된다. 무예에 능하고 인망도 높았던 능창군과 달리 능양군은 말이 별로 없고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았다.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고 하지만, 조용한 성품 탓에 크게 눈에 띄는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광해군은 이런 능양군을 평소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 인조반정의 주모자는 인조 자신과 외척세력, 심기원·김자점 등 소외된 서인 문신집단이 중심축이었다. 이들은 광해군에 대해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찌감치 반정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인조실록]과 [연려실기술] 에는 정치적 문란과 廢母, 친후금의 중립외교 등 광해군의 실정을 동기로 서술되어 있다.
광해군의 폐륜행위와 실정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인조 반정의 실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인조 개인으로는 광해군에 대한 원한이 왕위 찬탈로까지 이어진 것이고 그를 도운 서인 세력은 대북 일당독재로 권력에서 소외되었기 때문이다.
2.반정이 시작되다
-. 인조는 반정을 직접 지휘 하였다. 반정군은 돈화문을 부수고 궁궐에 불을 질렀다. 불길이 솟자 광해군은 북문 담을 넘어 도망쳤다. 궁궐에 불이 나기 전에 광해군은 반정의 고변을 보고 받았으나, 심각성을 몰랐고 위급함을 알았을 때는 이미 때가 늦었다. 광해군이 도망간 이상, 인조는 왕위에 오른 것이나 진배없었으나 인목대비의 고집으로 민가에 숨어있던 광해군을 데리고 대비전으로 갔다. 대비는 옥새를 가져오라 명령한 후 왕으로 책립할 준비를 갖추게 했다.
-. 인조는 왕위에 오른 뒤에도 인목대비를 깍듯하게 모셨다.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켜 쳐들어 오자 몽진 길에 올랐던 인조는 궁궐을 떠나지 않겠다는 대비 때문에 애를 태웠다. 인목대비가 반란군 수중에 들어가 마음을 바꾸게 되면 왕위에서 쫓겨나는 것은 시간 문제였기 때문이다. 광해군을 폐륜자로 몰아 반정의 명분을 삼았던 인조정권의 기반은 이처럼 약했고 그 후유증은 모역사건과 고변, 이괄의 난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3. 국제정세의 오판과 병자호란의 발발
-. 명은 신종의 학정과 임진왜란 참전으로 국운이 기울고 있었고, 이 틈을 타 여진의 누르하치는 1616년 후금을 건국하였다. 광해군은 이러한 국제적 정세에 휘말리지 않고자 후금과 원만하게 지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으로 대후금 외교정책은 강경노선으로 바뀌었다. 외교뿐만 아니라 인조와 반정세력들은 광해군이 벌인 일이라면 무조건 반대했다.
-. 광해군을 쫓아낸 서인세력들은 ‘도덕적 가치’를 내세운 정권답게 광해군의 중립외교 대신에 명과의 의리를 중시하는 도덕외교를 구사했고, 이는 결국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으로 일어났다. 정묘호란으로 후금과 조선은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
정묘화약을 맺은 이후 후금군은 철군했다. 1636년(인조 14년) 후금은 국호를 淸으로 고치고는, 종전의 입장을 바꿔 이제는 조선에 ‘군신관계’를 강요했다.
-. 청조의 요구에 인조는 청과 일전을 불사르겠다는 일념으로 척화파를 지지하였지만, 채 전의를 갖추기도 전에 청군은 압록강을 넘고 있었다. 1636년 압록강을 넘은 청군은 서울까지 진출하였고,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지 못하게 서울과 강화도를 연결하는 길을 차단했다. 강화도행을 포기한 인조는 우왕좌왕하면서 남한산성으로 들어갔고, 이로써 12월 15일부터 이듬해인 1637년 1월 30일까지 45일간의 남한산성의 항전이 시작되었다.
-. 남한산성의 항전은 청군의 위협 외에도 거센 눈보라와 맹추위와도 싸워야 하는 악조건 속에 진행되었다. 1637년 청군은 남한산성의 공격과 함께 강화도를 공격했다. 강화도가 점령되고 위기감이 고조되자 성내는 척화에서 강화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결국 인조는 항복 의식을 거행하기 위해 산성을 나서 삼전도로 향했다. 인조는 청태종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삼배구고두는 여진족이 천자를 뵈올 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었다.
4. 정통성이 약한 반정이 비극을 잉태하다
-. 도덕적 가치를 내세우며 성공한 인조반정이었지만, 인조의 치세를 보면 그의 왕위등극과 함께 백성의 고난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정통성 문제로 고민을 겪었고, 병자호란 뒤에는 청국의 요구로 왕위를 세자에게 물려주게 되지 않을까 불안했다.
8여 년의 인질생활을 끝으로 소현세자가 귀국했지만 인조는 냉담하게 대했고,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돌연사한 소현세자에 대해 사인조차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정황으로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의혹이 남아 있지만, 그가 죽지 않고 살았다 해도 인조는 그를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 _ 조선왕조 비운의 왕세자
1. 풀리지 않는 의문의 죽음
#. 세자가 병이 났는데, 어의가 학질로 진찰하였다. 이형익에게 명하여 침을 놓아서 학질의 열을 내리게 할 것을 청하니, 왕이 허락했다. [인조실록]
사도세자와 함께 왕세자였음에도 왕이 되지 못하고 요절한 비극의 주인공이다. 그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소현세자는 1612년(광해군 4) 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친이 왕위에 오르자 14세의 나이로 세자로 책봉되었고, 1627년 강석기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병자호란 후 정축맹약에 따라 1637년(인조 15) 아우인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8년 만에 귀국하였지만,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사망하였다. 오한이나 병을 치료 받은 지 불과 4일 만이었고, 34세의 젊은 나이였다.
소현세자의 병명이 학질로 진단을 받은 이후 의원들은 적절한 처방을 진행하고 있었으나 세자의 증상은 급격히 나빠져 갔다. 병세가 급격히 나빠지면서 사망했다. 급작스런 죽음이 아닐 수 없다.
2. 부친인 인조의 미움을 받다
-. 소현세자가 심양에 도착한 것은 1637년 이었다. 소현세자는 조선과 청의 원만한 관계를 위해 고관들과 친분을 맺었다. 또 뇌물외교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청과의 무역이나 둔전(屯田) 경영에 참여하여 재력을 비축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조선인 포로를 구출해 냈다. 부인인 세자빈 강씨는 영리하고 사업 수완이 좋아 외교적인 문제는 소현세자가, 경제적인 문제는 세자빈 강씨가 주도하였다.
-. 청은 중국 통일의 야망이 있었으므로 조선의 도움이 필요했고 이를 위해 세자를 적극적으로 포섭하고자 했다. 조선을 담당하고 있던 용골대는 세자와 마음을 터 놓는 사이처럼 지냈다.
처음 심관 생활은 엄중한 감시와 제한 속에 보내야 했지만, 점차 청은 세자에게 각별하게 대했다.
몽고 각지의 행사에도 초대했고 정기적인 연회에도 세자 부부를 참석시켰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조선지원병과 물자요구가 있었고 이를 조선에 보고해야 하는 세자의 입장은 항상 바늘방석이었다.
1644년 청은 북경을 차지했고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는 자살했다. 더 이상 청은 조선의 왕세자를 인질로 묶어둘 이유가 없어졌고, 소현세자는 조선으로 귀국할 수 있었다.
-. 중원을 차지한 청의 힘을 지켜 본 소현세자는 삼전도의 굴욕만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있는 인조와 다른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반대하여 쿠데타를 일으킨 인조와 서인세력은 소현세자의 태도에 대해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오랜 인질 생활을 마치고 조선에 귀국했지만, 인조는 소현세자를 반기지 않았다.
어느덧 인조에게 소현세자 내외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대상으로 비춰지고 있었다. 귀국 전부터 소현세자가 왕이 되고자 청나라를 부추겨 부친인 인조를 심양에 오게 만드는 공작을 하고 있다는 풍문이 돌았다.
인조는 청이 왕위를 세자에게 양위하라고 할까 봐 불안해했다. 인조에게 비친 소현세자 내외는 청에서 고초를 겪다 온 것이 아닌 호강을 하다 온 것처럼 보였다.
3. 선교사 아담 샬과의 만남
-. 소현세자는 귀국하기 전 독일 출신의 신부인 아담 샬을 만났다. 아담 샬과 친교를 맺으며 그로부터 학술과 종교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다. 세자가 희망하는 대로 서양의 천문학을 알려주고 각종 천주교 서적과 관측기구를 선물로 주었다. 이때 소현세자가 아담 샬로 받은 선물은 천주상·지구의·천문서 등이었다.
4. 강빈과 원손의 죽음
-. 인조는 세자가 죽으면 세손에게 왕위를 전해야 하는 법을 어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인조 입장에서 강빈과 원손의 존재는 골칫거리였다.
인조는 정통성 확보에 예민했고, 왕좌에 대한 집념이 강한 인물이었다. 그는 화근을 미리 자르고자 했다.
그 첫 번째 칼끝은 강빈의 형제들에게 향했다.
인조는 봉림대군이 세자가 된 것에 강씨들이 불만을 품고 있을 것이라 하며 강빈의 형제 4명을 귀양 보냈다.
-. 1646년 인조에게 올린 전복구이 안에 독약이 들어 있었다. 인조는 강빈을 주모자로 지목했다. 김자점은 인조의 주장에 손을 들어 줬다. 강빈의 형제 들은 국문을 받다 죽었다. 강빈은 왕을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쓰고 사약을 받았다. 이어서 소현세자의 세 아들 중 두 아들 또한 제주도 유배 중 의문의 죽음을 당하게 되었고, 강빈의 친정 어머니도 처형되었다.
#. 김자점
음보로 출사해 병조좌랑에까지 이르렀으나 인목대비 폐비 논의에 반대하는 등 광해군 때에 대북 세력에 맞서다가 정계에서 축출당하였다. 최명길. 심기원과 함께, 사돈 관계에 있는 이귀를 중심으로 반정을 모의하던 중 1622년(광해군 14) 김류. 신경진 등과 연결되었다.
1623년 이귀. 김류. 이괄 등과 함께 반정을 성공 / 반정 직후 호위대장이 된 신경진 휘하의 종사관으로 임명 / 호조좌랑을 거쳐 동부승지로 승진 / 반정 공신인 정사공신 1등에 녹훈 / 공신녹훈을 전후해 반정의 두 주역인 김류와 이귀가 서로 대립하자, 이후 김류 쪽에 가담하였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인조를 호종 / 순검사·임진수어사에 임명 / 한성부판윤 /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1636년 청나라의 움직임에 대비할 목적으로 그는 평안도에 파견되어 수비 체계를 바꾸는 등의 작업을 하였다. 그러나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적절히 대처하지 못하고 토산(兎山)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듬해 전쟁이 끝난 직후 패전에 대한 도원수로서의 책임을 지고 먼 섬으로 유배되었다.
반청론자(反淸論者)들에게 염증을 느낀 인조의 후원으로 1639년에 고향으로 풀려나고, 이듬해에는 강화부윤·호위대장에 임명되었다. / 이후 김류와의 제휴를 바탕으로 병조판서 / 판의금부사를 거쳐 / 우의정 및 어영청도제조에 오르고, 진하 겸 사은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1644년에는 경쟁 세력인 심기원 등을 역모 혐의로 도태시키고,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에 봉해졌으며, 사은 겸 주청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 그 뒤 대부분의 공신 세력가들이 죽거나 은퇴하고 일반 반청 사류들은 인조에 의해 거부되는 상황 속에서, 1646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올라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였다.
1645년에는 숙원 조씨(淑媛趙氏)와 결탁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죽이는 데 가담한 듯하다.
이듬해에는 세자빈 강씨(姜氏)에게 인조 시해 혐의를 씌워 사사하게 한 뒤,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축출하고 강빈의 형제들을 제거하였다.
또 인조와 조씨의 소생인 효명옹주(孝明翁主)와 자신의 손자인 세룡(世龍)을 혼인시켜 궁중과 유착하였다.
한편으로 청나라 사신이나 역관 정명수들과 결탁해 청나라의 후원을 얻어 권력의 기반을 삼았다. 1646년 청나라가 포로가 되었던 임경업(林慶業)을 보내오자 고문으로 죽게 하였다.
인조 말년에는 신면(申冕) 등을 무리로 거느려 낙당(洛黨)이라고 지목되었으며, 원두표(元斗杓)를 중심으로 한 원당(原黨)의 무리와 대립하였다.
1649년 인조가 죽자 효종은 즉시 김집. 송시열. 권시. 이유태. 김상헌 등을 불러들였고, 이들의 공격에 의해 1650년(효종 1) 홍천에 유배당하였다.
그곳에서 역관인 심복 이형장을 시켜 청나라에 새 왕이 옛 신하들을 몰아내고 청나라를 치려 한다고 고발하고, 그 증거로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않은 장릉지문(長陵誌文)을 보냈다.
청나라가 즉시 군대와 사신을 파견해 조사했으나, 이경석. 이시백. 원두표 등의 활약으로 그 기도는 실패하고 광양으로 유배되었다.
1651년에 손부인 효명옹주의 저주 사건이 문제되고, 아들 익이 수어청 군사와 수원 군대를 동원해 원두표·김집·송시열·송준길을 제거하고 숭선군을 추대하려는 역모가 폭로되어 아들과 함께 복주당하였다.
그의 무리인 김응해. 기진흥. 이파. 심지연. 황헌 등도 파직당하거나 교체되었다.
문과 급제를 거치지 않은 공신으로서의 권력 추구, 궁중과의 파행적인 유착 관계, 청나라에 대한 매국 행위 등 사림 사회의 명분에 어긋나는 갖가지 행동으로 인해 오랜 세월을 두고 비난을 받았다.
효종(孝宗 / 1619~1659 / 재위 1649~1659)
재위 10년간 ‘숭명배청(崇明排淸)’과 ‘복수설치(청나라에 당한 수치를 복수하고 설욕함)’에 신명을 바친 왕 효종.
북벌의 완성을 위해 군사력을 증강하고, 반청(反淸)을 외친 재야의 사림도 등용했지만, 복수를 위한 ‘10년의 꿈’은 무너졌다.
1. 인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다
-. 어머니는 서평부원군 한준겸의 딸인 인열왕후 청주 한씨이며, 효종은 13세에 한 살 위인 인선왕후와 혼인하여 1남 6녀를, 후궁인 안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1녀를 두었다.
-.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친인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는데, 이때 효종의 나이는 5세였다. 효종은 어려서부터 글읽기를 좋아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장난치거나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과는 행실이 무척 달랐다고 하는데 자신의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냉정한 모습은 부친인 인조와 비슷하다. 인조는 효종을 두고 항상 인성이 훌륭하고 효심이 지극하다고 칭찬하여 주위의 사랑과 기대가 각별했다고 전한다.
1625년(인조 3)에 일곱 살 위인 형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가 먼저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효종이 봉림대군에 봉해졌다. 1649년 인조가 승하하자 봉림대군(鳳林大君)이 3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2. 청나라 인질 생활과 귀국
-. 18세가 되던 1636년(인조 14)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효종은 인조의 명령으로 아우인 인평대군과 함께 강화도로 피난을 갔다. 1637년 강화도가 함락되고 효종은 인조가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의 예를 행하는 치욕을 지켜보아야 했다. 효종은 형인 소현세자, 척화신(斥和臣) 등과 함께 볼모가 되어 중국 심양으로 끌려갔다. 청나라에 가서는 소현세자와 함께 명청(明淸)의 격전지를 따라다녀야 했다. 그 사이 형제간의 우애는 점점 돈독해졌다. 청나라가 산해관을 공격할 때 소현세자의 동행을 강요하자 자신이 대신 가겠다고 고집하였고,서역을 공격할 때에도 소현세자와 끝까지 동행하여 그를 보호했다.
-. 효종은 1642년(인조 19)에 심양 관저에서 현종(顯宗, 재위: 1659~1674)을 낳았다. 현종은 조선시대에 외국에서 태어난 유일한 왕이다. 효종은 26세인 1644년(인조 22)에 청나라에 있은 지 8년 만에 일시적으로 귀국했다가 청나라가 심양에서 북경으로 천도를 하자 소현세자와 함께 북경으로 들어갔다. 효종의 완전한 귀국은 1645년 이다. 효종보다 앞서 귀국한 소현세자가 급서(急逝)하자 20여일 만에 살얼음판 같은 본국으로 귀국한 것이었다.
3. 정통성의 약점을 안은 왕위 계승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은 宗統(맏아들의 혈통) 상의 약점을 안고 있었던 왕이었다. 이 같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친청파인 김자점의 주도로 적장손인 소현세자의 아들을 제치고 1645년 27세의 나이로 세자의 자리에 올랐다.
반면, 소현세자의 부인과 그 집안은 철저하게 몰락했다. 강빈의 억울한 죽음은 항상 효종을 괴롭혔다.
4. 북벌의 추진과 송시열
-. 강빈의 신원을 주장하던 김홍욱이 맞아 죽자 민심은 요동쳤다. 효종은 김홍욱 사건을 무마하면서 민심을 수습하는 여러 가지 정책을 시행했으니, 그 중 하나가 북벌이다. 그는 김상헌의 제자로 유배중이던 조석윤을 동지중추부사로 등용하고 송시열을 이조참의로 등용하는 등 북벌을 대의로 내세우면서 여러 가지 개혁을 시도했다. 효종은 또 두 차례의 외침으로 말미암아 흐트러진 경제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김육 등의 건의로 1652년에 충청도, 1657년에는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에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아울러 서양역법인 시헌력을 반포하여 개력(改曆)을 단행했다.
효종의 바람과 달리 송시열은 북벌론을 실현에 옮길 인물은 아니었다. 결의에 찬 효종의 북벌 정책에 맞장구는 커녕 격물(格物)과 치지(治知)를 이야기하며 치국 이전에 수신(修身)이 먼저라고 했다. 마음 수양과 민생 안정이 우선이라는 것이다. 송시열의 북벌론은 명에 대한 사대(事大)이자 종속관념에서 나온 것이었다. 군신관계였던 명을 파멸시킨 청에 대해 관념적인 복수심은 있어도 현실적으로 복수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북벌론은 목표는 같았지만 목적이 달랐다. 두 사람의 북벌론은 동상이몽에 불과했다. 효종은 송시열과의 정치적 제휴를 통해 사림세력의 반발을 억제하고 이들 세력들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효종은 송시열을 전면에 내세워 불안한 정국과 민심을 추스르려 했고, 송시열은 효종의 지지를 앞세워 정치적 입지를 다질 뿐이었다.
효종은 과연 왕권강화만을 위해 북벌을 이용한 인물이었을까.
효종의 북벌정책이 불안한 정통성을 극복하기 위한 왕권 강화책이었음은 분명하다.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반청적(反?的) 사림세력의 지원이 필요했고, 반청적 사림세력 역시 재기를 위해서는 효종의 지원이 있어야 했다. 효종과 반청적 사림세력의 정치적 의도는 북벌론으로 자연스럽게 귀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질 시절 청나라 전쟁터를 누빈 효종에게 북벌은 어쩌면 청에 대한 실질적인 불안감이었는지 모른다. 청나라는 반드시 멸망해야 하는 오랑캐였지만, 과연 멸망한 청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그곳은 요동이었다. 중국을 차지한 청이 멸망하여 요동지역으로 돌아온다면 조선은 다시금 위기에 빠지게 되는 딜레마가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조선은 계속적으로 청의 동향을 살펴야 했고, 국경에 대한 불안감은 숙종대까지 이어졌다.
5. 의문스러운 효종의 죽음
-. 북벌이라는 원대한 꿈을 가졌던 효종은 1659년 5월, 재위 10년 만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따르면, 효종의 귀 밑에 종기가 심각했고 이에 침의(鍼醫) 신가귀(申可貴)가 침을 놓아 처음에는 고름을 조금 짜내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몇 말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피를 쏟고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효종은 한마디 유언도 없이 승하했다.
-.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은 ‘타살설’에 무게를 두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효종의 종기를 터트려 죽게 만든 신가귀는 수전증이 심한 의원이었다. 수전증이 있었던 신가귀는 혈맥을 범하였다. 일설에는 신가귀가 혈맥을 잘못 범한 것이 아니라 腫毒(종기의 독)이 심하여 이것이 흉부에까지 퍼졌고 血道가 종기에 집중되었는데, 함부로 침을 놓아 터뜨렸다고도 한다. 결국 효종을 죽게 만든 신가귀는 교형(絞刑)에 처해졌다.
-. 북벌을 효시로 내세운 효종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한 군왕이었다.
왕위에 오른 뒤부터는 복수설치의 의지를 다져나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효종은 서인과 남인은 물론 재야 사림의 지지를 상실하여 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송시열을 중용하였지만, 왕권과 신권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조선시대 왕위에서 쫓겨나거나 혹은 타살설이 도는 군왕의 공통점은 전제왕권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왕권과 신권의 충돌에서 신권은 항상 승전가를 불렀다.
⑦ 성 종 - 권력은 공신들 손에, 어린 임금은 때를 기다렸다
현실에 참여해 활동하는 것 못지않게 때를 기다리는 것도 중요하다. 때가 아닌데도 섣불리 나섰다가
불행한 종말을 맞은 사례는 무수히 많다. 갓 즉위한 성종은 어렸지만 때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그는 현실이 공신집단의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성종은 공신집단에 맞서는 대신 때를 기다렸다. 기다림 또한 정치의 일부라는 사실을 어린 나이에 터득했던 것이다.
⑧ 영 조 - 검소한 군주의 눈물도 양반을 누르지 못했다
군주가 백성들의 고통에 동참하는 궁극적 길은 스스로 가난한 생활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군주는
백성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잘못된 제도를 혁파하는 제도개혁에 앞장서는 것으로 백성들의 고통에 동참해야 한다. 영조는 절검생활을 앞장서 실천하는 유학 군주였으나 백성들은 물론 시대도 그런 개인적 실천보다는 잘못된 제도개혁을 요구했다.
정조 - 정적과도 손잡은 '타협의 명인'
▲ 정조에 대한 사료로는 ‘정조실록’과 정조가 曾子의 一日三省의 뜻을 취해서 작성한 ‘日省錄’과 매일 반성하는 뜻에서 자신의 언행을 기록하게 한 ‘日得錄’과 규장각 일기인 ‘內閣日曆’이다.
‘정조실록’은 노론벽파가 집권하면서 작성되었고, ‘일성록’은 일부 내용이 의도적으로 잘려나갔다
따라서 정치적 의도를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하며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이나 정약용의 저술 같은 개인 기록들로 보충해야 한다.
정조를 이해할 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사도세자 문제이다.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 쪽에서는 ‘죄인의 아들은 임금이 될 수 없다’는 ‘罪人之子 不爲君王’이란 ‘八字凶言’을 조직적으로 유포시켰다.
그러나 정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노론벽파를 적대시하는 대신 포용에 나섰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영조의 유훈 때문이었다.
영조는 죽기 직전 사도세자 문제를 제기하는 자는 “왕법으로 처단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정조가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면 노론벽파는 선왕의 유훈을 어긴 것으로 쿠데타의 명분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정조는 사도세자를 살해한 노론벽파 전체를 적으로 돌릴 경우 정상적인 정국 운영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렇다고 사도세자 사건을 없던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도 없었다.
정조는 노론벽파의 격렬한 반대를 뚫고 즉위에 성공했는데,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세력과 사도세자를 죽인 세력이 동일한 정치세력이었다.
화완옹주의 양자 정후겸이나 혜경궁 홍씨의 숙부 홍인한, 대비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 등이 그런 인물들이다.
그래서 정조는 사도세자 문제를 가지고 이들을 처벌하기보다는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혐의로 처벌했다. 그래서 소기의 정치적 효과를 거두면서도 선왕 영조의 유훈은 위배하지 않는 운영의 묘를 살린 것이다.
부친을 죽인 원수들과 타협하는 것은 초인적 인내가 필요했다.
정조는 재위 24년 6월 병석에 누웠을 때 “두통이 많이 있을 때 등쪽에서도 열기가 많이 올라오니 이는 다 가슴의 화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가슴의 화기는 부친을 죽인 원수들과 얼굴을 맞대고 정치하는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중 대표적 인물이 具善復이다. 그는 영조 때부터 군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른바 宿將으로서 사도세자 사건에 직접 관련되어 있었다.
그러나 정조는 그를 계속 훈련대장, 병조판서 등 군의 중요 보직에 임명하다가 재위 10년(1786년)에야 다른 역모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처형한 후 이렇게 말했다.
“역적 구선복으로 말하면 홍인한보다 더 심하여 손으로 찢어 죽이고 입으로 그 살점을 씹어 먹는다는 것도 오히려 헐후(歇後)한 말에 속한다.
매번 경연(經筵)에 오를 적마다 심장과 뼈가 모두 떨리니, 어찌 차마 하루라도 그 얼굴을 대하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그가 병권을 손수 쥐고 있고 그 무리가 많아서 갑자기 처치할 수 없었으므로 다년간 괴로움을 참고 있다가 끝내 사단으로 인하여 법을 적용하였다.”(정조실록 16년 윤4월 27일)
정조는 재위 13년 양주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묘소를 수원 화성을 옮겨 현륭원으로 삼고 자주 능행(陵幸)했는데 현륭원에 참배할 때면 “슬픔을 억제하지 못하여 옥체를 땅바닥에 던지고 눈물을 한없이 흘리면서 손으로 잔디와 흙을 움켜잡아 뜯다가 손톱이 상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정조실록 18년 1월 20일)고 할 정도로 부친을 애도했다.
그러나 정조는 부친을 위한 최고의 복수는 조선을 부강한 나라로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조실록’이나 ‘일성록’ 등의 관찬사료에는 보이지 않지만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에는 정조가 사도세자와 혜경궁이 칠순이 되는 갑자년(1804년)에 왕위를 순조에게 물려주고 상왕 자격으로 화성으로 가서 사도세자 추숭사업을 하려 했다고 전한다.
▲ 정조의 초상 / photo 조선일보 DB “원래의 소원을 이루어 마마(혜경궁)를 모시고 화성으로 가서 평생에 사도세자께 자손으로 이루지 못한 통한을 이루어낼 것입니다. 내가 선왕의 하교를 받아 이 일을 이루어내지 못하는 것이 지극히 원통하나 이것 또한 의리요, 왕세자가 나의 부탁을 받아 내 소원을 이루어내어 내가 못한 일을 내 대신 행하는 것이 또한 의리입니다.”(한중록)
정조 자신은 선왕의 유훈을 받았으므로 사도세자 추숭사업에 나설 수 없지만 아들 순조가 할아버지 사도세자 추숭사업을 하는 것은 영조의 유훈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논리였다.
또한 정조는 ‘지금 신하들이 사도세자 추숭사업을 안 하는 것도 의리이고, 훗날 신하들이 추숭사업을 하는 것도 의리’라고 말했는데, 이는 사도세자 문제에 있어서 자신의 입장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추숭을 반대하는 세력의 입장도 감안한 것으로서 바로 이 부분이 정조와 집권 노론이 타협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정조는 이런 타협을 통해 조성된 왕권으로 미래를 지향했는데 이 부분이 바로 정조의 진면목이다.
정조 즉위 당시 조정은 노론 일당독재 체제였고, 노론의 정치이념이던 주자학 유일사상 체제였다.
정조는 일당체제를 다당제로 바꾸고, 주자학 유일사상을 다원적 사상 체제로 바꾸어야 조선의 미래가 있다고 생각했다.
정조가 다당제로 바꾸는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互對法이었다. 호대법은 이조판서가 노론이면 참판은 소론, 참의는 남인을 임명해 상호 견제하게 하는 인사방식이었다. 그러자 노론은 남인들을 西學(천주교)을 신봉하는 신서파(信西派)로 몰아 제거하려 했다.
서학이 사학(邪學)이라며 국법으로 처단해야 한다고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정조는 노론의 논리를 뛰어넘는 논리로 이를 거부했다.
“정학(正學·성리학)이 밝아져서 사학(邪學)이 종식되면 상도(常道)를 벗어난 이런 책들은 없애려 하지 않아도 저절로 없어져서 사람들이 그 책을 연(燕)나라, 초(楚)나라의 잡담만도 못하게 볼 것이다.
그러니 근원을 찾아 근본을 바르게 하는 방법이 바로 급선무에 속한다.”(정조실록 12년 8월 6일)
정조는 이처럼 천주교는 국법으로 단죄할 것이 아니라 성리학이 바로 서면 저절로 소멸된다는 논리로 사상 탄압을 거부했던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정조는 조선의 성리학을 약화시키며 다원사상 체제를 지향했다.
정조가 자신을 성리학자로 자처한 것은 실제 그가 성리학자여서가 아니라 노론과의 이념 논쟁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서양 과학지식의 습득을 통해 성리학이 이미 낡은 것임을 알고 있었다. ‘사암(俟菴)先生年譜’에는 재위 16년(1792년) 부친상으로 낙향해 시묘(侍墓)살이를 하는 정약용에게 정조가 ‘기기도설(奇器圖說)’을 내려주며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리는 기계를 고안해보라고 했다고 전한다.
예수회 선교사이자 과학자였던 테렌츠(Terrenz.J, 중국명 등옥함·鄧玉函)가 지은 ‘기기도설’이 바로 무거운 것을 들어올리는 역학(力學)의 원리에 관한 책이었다.
‘정조실록’ 2년(1778년) 2월 14일조에는 정조가 천재로 유명한 승문원 정자(承文院 正字) 이가환(李家煥)과 논의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서양의 과학기술에 대해서도 수준 있는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일득록’에는 정조가 “땅이 둥글다는 설은 ‘주비경(周?經)’에 처음 보이는데 혼천(渾天)의 논리로 징험해보면 땅이 둥글다는 것이 분명하다. 남쪽으로 200리를 가면 북극이 1도 낮아지고 남쪽의 별이 1도 많이 보이며, 북쪽으로 200리를 가면 북극이 1도 높아지고 남쪽의 별이 1도 적게 보인다. 만일 땅이 둥글지 않다면 어떻게 그러하겠는가”라며 지구가 둥글다고 말한 사실이 전해진다.
정조는 초인적 의지로 자신의 몸을 닦고 나라를 다스렸다. 그는 일체의 잡기를 멀리했다.
“나는 음악이나 女色, 사냥 등은 좋아하는 것이 없고, 즐거워할 만한 인간사로는 국정을 하는 여가에 두세 文士와 經典을 이야기하고 詩를 말하며, 옛일을 토론하고 지금의 일을 증험하여 심신을 유익하게 하는 것에 불과하다.”(일득록)
또한 정조는 검소했다.
“명주옷이 편리한 무명옷보다 못하다. 대체로 사람은 日用하는 의복이 한번 화려하게 되면 사치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사치하는 풍습이 점점 성하게 된다.… 내가 나쁜 옷이 좋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으면 가난한 여인의 고생하는 모습이 생각나고, 서늘한 궁전에 있을 때면 여름에 밭에서 땀 흘리는 농부의 노고가 생각나 경계하고 두려운 마음이 항시 간절하다. 옛 사람이 ‘검소함에서 사치로 가기는 쉬워도 사치에서 검소함으로 가기는 어렵다’고 말했으니, 이것이 경계해야 할 점이다.”(일득록)
정조의 이런 검소함은 확고한 철학에서 나온 것이다. 정조는 규장각 閣臣 金祖淳에게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히는 것은 우리 왕가의 법도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정치철학으로 나라를 다스렸던 것이다.
“임금 노릇 하는 도리에 대해 여러 聖人이 말한 것이 지극하다. 첫째는 하늘을 공경하고, 둘째는 조상을 본받고, 셋째는 백성을 사랑하고, 넷째는 어진 이를 높이는 이 네 가지 일이 곧 임금으로서의 훌륭한 절조이다.”(일득록)
이 시대 왜 정조가 다시 부각되는지를 잘 말해주는 구절들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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